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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

오키나와 현은 40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0.01제곱킬로미터 이상의 면적을 가진 섬은 160개이다. 최동단으로부터 최서단까지의 거리는 약 1,000킬로미터이며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의 거리는 약 400킬로미터이다. 최북단: 이오토리섬(硫黄鳥島) 최남단: 하테루마섬(波照間島) 최동단: 기타다이토섬(北大東島) 최서단: 요나구니섬(與那國島) 낙도가 많으며 낙도의 의료 환경은 인력 부족과 경제적 이유로 인해 부족한 실정이며 병원이 없이 진료소만 있는 섬도 많다. 그 때문에 낙도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응급 환자나 중병에 걸린 환자의 공수는 육상자위대나 일본 해상보안청이 시행한다. 미야코섬(宮古島)와 이시가키섬(石垣島)에는 현립병원이 있어 오키나와섬이 먼 낙도에서 급히 공수될 때 가는 경우가 많다. 현청 소재지인 나하시의 반경 1,000 km 내에는 타이베이, 후쿠오카, 상하이, 푸저우가 있고, 1,500 km 내에는 오사카, 서울, 마닐라, 홍콩등이 있어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일본과의 중간 지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오키나와섬은 남부의 나하 시(31만7천 명)와 중부의 오키나와시(14만1천 명)를 중심으로 한 섬의 남부와 중부 17개 시정촌에 섬 인구의 91%(오키나와현 전체 인구의 82.8%)인 120만 명의 인구가 밀집해 있다. 아열대에서 생물에게 매우 적합한 기후를 타고 나 귀중한 동식물이 많다. 이리오모테섬과 이시가키섬의 일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리오모테살쾡이 등의 귀중한 생물이 많이 있다. 덧붙여 일본의 중요 습지 500개 가운데 54개가 오키나와 현내에 있다. 연간 강수량은 많지만 장마와 태풍에 의한 강우가 많고 매년 편차가 크며 큰 하천이 없이 곧바로 바다로 유입되는 양이 많기 때문에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1946년에 비해 인구가 2배 이상으로 급증함에 따라 물 부족은 더욱 심화되었다. 단수가 일상화되었으며 1981년부터 1982년 사이의 최악의 갈수기에는 326일 단수라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그 때문에 지붕 위에 물탱크를 설치한 가정이 많다. 그러나 수도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단수가 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일본의 영토이지만 본토에 비해서 지진이 적은 편에 속한다. 인구 밀도는 전 일본의 도도부현 가운데 9위이며 규슈 권역에서는 2번째이다. 기상 야에야마 제도는 열대 기후로 열대 우림 기후에 속하며 그 이외의 지역은 온대 기후에 속한다. 오키나와 현 각 지방 모두 고온 다습하고 연 강수량은 2,000밀리미터 이상이며 연평균 기온은 약 22도이다. 오키나와 지방은 동아시아에서 생겨난 많은 태풍이 접근한다. 1977년 2월 17일에 구메섬(久米島)의 측후소에서 처음으로 눈이 관측되었다(실제로는 진눈깨비였지만 분류상은 눈과 동일 취급으로서 기록된다). 이 기록은 일본 기상청이 공식으로 발표한 강설 기록인 것과 동시에 오키나와 현의 기상 관측사상 최초의 적설 기록이다. 역사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오키나와의 역사입니다. 과거 이곳은 류큐 왕국을 이뤘던 곳이었다. 고려(태조 왕건) 시대에 고려에도 속국임을 자처한 곳이다. 삼별초 세력이 자리를 잡은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나중에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메이지 시대(1879년)에는 완전히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다(류큐 처분). 태평양 전쟁기간에는 구 일본군과 미군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의 강요로 인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부터는 미국의 지배를 받다가 1972년 오키나와 반환으로 일본에 다시 편입되었다. 미군은 이곳을 일본에 편입했지만 일본 내 대다수의 미군 기지가 이곳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